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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으로 - 일왕 암살 시도했던 박열
이한솔 기자  |  gc599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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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06  14: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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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2년 2월 3일 경상북도 문경군에서 태어난 박열은 착취당하는 조선인들의 참상을 보며 자랐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지만 국내에서 더 이상 독립운동을 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1919년 10월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온건 노선으로는 조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사회주의 운동과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고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다. 이후 그는 1920년에 의결단, 1921년에 흑도회, 1922년 흑우회 등 정부주의자 단체에 가담한 아나키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박열은 1922년 2월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조선청년〉이라는 잡지에 ‘개새끼’라는 시를 기고했다. 당시 이 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을 만나 서로의 사상에 공감해 함께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박열은 1923년 4월 ‘불령사’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한 후 그해 9월 연인 가네코의 협조를 얻어 일왕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암살 시도가 발각되면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친 신문을 받았다.
 박열은 공판에 앞서 ‘죄인 취급하지 말 것’, ‘재판장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힐 것’, ‘조선어 사용을 허가할 것’ 등 4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는 이들과의 기 싸움에서 끝까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박열은 1926년 3월 가네코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같은 해 4월 5일 그들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지만 가네코는 복역 중 자살하고 박열은 1945년 8·15 광복으로 22년 2개월 만에 석방된 후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단장을 맡게 된다.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된 그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하며 군대축소와 국제적 중립국화에 노력하다가 1974년 1월 17일 서거했다. 현재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으며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최근 개봉했던 영화 ‘박열’의 이준익 감독은 “참혹한 역사를 묻으려는 일본 내각을 추궁하고, 적극적으로 항거했던 박열에 대해 우리가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스스로 부끄러웠다”며 “영화로나마 박열의 삶과 가치관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마음이 영화 ‘박열’을 낳은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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