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4년(태조4년) 창건된 국보 1호 숭례문은 언제나 도시의 바쁜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숭례문은 의기양양하게 뻗은 고층 빌딩숲에서 조금은 초라하게 자리를 지켰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켜왔던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은 빠르게 달리는 차와 앞만 보고 걷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

역사의 오점으로 남을 그 날….

2월 10일 오후 8시 50분. 서울종합방제센터에 숭례문 화재 신고가 접수됐다. 50여대의 소방차가 숭례문을 구해보려 달려왔지만 역부족이었다. 1시 55분. 석반을 제외한 2층 누각 전체 및 1층 누각 대부분이 붕괴됐다.

다섯 시간만에 약 600년 동안 서울의 정문역할을 담당해온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해 온 세계적인 문화유산 숭례문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가는 숭례문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입에서 원망과 후회의 탄성이 쏟아졌다. 이 날 만큼은 온 국민이 순수하게 숭례문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멈춰 섰다. 고층빌딩 사이에 묻혀있던 숭례문, 조상의 지혜와 역사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은 숭례문은 화마에 뒤덮인 후에야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숭례문은 이제 고유의 모습을 잃고 복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아픈 참사는 국민들의 가슴에 훌륭한 교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문화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급증한 것이다. 빠른 속도로 변화와 발전만 추구하던 우리나라가 문화재와 역사에 대한 향수를 돌아보는 것. 숭례문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온 국민이 문화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심을 기울일 때인 것이다.

조선시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인 숭례문은 현재 잦은 비바람과 강설로부터 안전한 보호를 위해 임시덧집 및 우장막(우천대비임시장막)에 싸여져 있다. 숭례문 화재 이후 매일 50여 명의 인원을 투입하여 지금까지 건물 외부의 화재잔해를 수습하고, 2차 붕괴방지를 위해 일부 위험한 부재의 해체와 남아있는 부재의 구조를 보강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도시화에 밀려난 문화유산의 현장

가려진 숭례문을 지나 서울 종로구 세종로동 신문로 2가로 오면 숭례문의 형제뻘인 돈의문(敦義門)의 터가 남아있다.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은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이었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철거되고 말았다. 현재 강북삼성병원 보영빌딩 앞 언덕에 터만 남아있는 상태다.

600년 역사를 지켜온 서울 도성의 흔적은 많이 남지 않았다. 1396년(태조 5년)에 축성된 성벽은 서울을 감싸 안은 백악, 낙산, 남산, 인왕산 능선을 따라 축조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당부분 파괴, 소실됐다. 특히 60년대 이후의 근대화 과정에서 무분별한 도시계획으로 인해 파괴됐다.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옛 성벽의 일부는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 일대에 초라하게 남아 있다.

서울 성곽을 잊지 않고 도시 속에서 향유해 보려는 노력도 존재한다. 서울시는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낙산의 옛 모습과 역사성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여 지금의 낙산공원을 만들었다. 야경이 특히 아름다운 낙산공원에서는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동대문 시장의 네온사인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아름다운 야경 덕분에 드라마에 출연한 횟수도 상당하다.

성곽의 나라 조선이 공격을 당하면 가장 굳건히 서서 보호해 주던 서울 성곽. 이제 그 성문과 성벽 사이사이에는 차도와 빌딩들이 들어서 다시는 연결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성곽의 남쪽 정문과 서쪽 문이 심하게 훼손되고 나니, 남아있는 성벽의 일부가 더욱 쓸쓸해 보인다. 조선의 옛 수도 한성이 품은 종묘, 사직, 궁궐, 성곽 등은 국민의 관심과 보호를 기다리며 제 자리를 간신히 지켜가고 있다.

얼마나 더 잃어야 지킬 것인가

헌법은 제 9조에서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헌법의 문화국가 조항에 근거하여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보호의 목적을 “문화재를 보존하여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함과 아울러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제 1조)고 했다.

우리나라는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문화재위원회의 판단에 따라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큰 문화재를 보물로 지정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도가 높은 문화재는 다시 국보로 지정하는 형식을 따르고 있다.

우리의 문화재 관리는 어느 수준일까. 지난 2005년 4월에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의상(義湘)이 세운 낙산사가 화재로 소실됐을 때, 문화재청은 그 후로 산불 등으로 목조문화재가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요 목조문화재 방재시스템 구축사업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불과 3년 전 발생한 문화재 참사가 남긴 교훈은 금세 세월에 묻혀 잊혀졌다. 지난해 1차로 해인사, 봉정사, 무위사, 낙산사 등 4곳에 수막설비, 경보시설 등이 설치됐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국보 1호 숭례문은 방재시스템 구축을 기다려야하는 상태였다.

해외의 문화재보호법 및 사례

1800년대 후반,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오래된 기념물들이 파괴되고 자연도 심하게 훼손됐다. 이에 영국에서는 보호해야할 대상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여 보호, 보전하려는 운동이 설립됐다. 우리말로 옮기면 ‘자연신탁국민운동’이라 할 수 있는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 for Places of Historic Interest or Natural Beauty)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이나 기부, 증여를 통해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자원과 문화자산을 확보하여 시민 주도로 영구히 보전하는 시민환경운동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산업혁명 당시의 공장이나 운하를 매입하여 산업기념물로 보전하고, 상업적 목적 앞에 파괴되는 해안선을 지키기 위한 넵튠(로마신화의 바다 신)계획 등을 추진해 왔다.

내셔널트러스트에서 확보한 문화유산은 1907년에 제정된 내셔널트러스트법에 의해 보호받는다. 영국 내셔널트러스트는 ‘어떠한 경우도 자산의 양도가 불가능하다’는 이른바 양도불능의 권한을 가졌다. 이 권한에 의해 영국의 정부조차도 내셔널트러스트의 자산을 건드릴 수 없다.

재정은 대부분 회원이 부담하는 소액의 회비와 기부금으로 조달한다. 발족 당시 몇 백 명이던 회원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1만 명, 1982년 100만 명을 넘어서 현재는 260만 명에 이른다. 또 영국토지의 1.5%, 해안지역의 17%를 소유하고 있다. 미국, 일본, 뉴질랜드 등 24개국에서 내셔널트러스트가 활동한다.

2000년 1월에 정식으로 발족한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전국 16곳에서 1천 300여명의 회원이 활동 중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강화군 매화마름 군락지, 미술사학자인 혜곡 최순우 고택, 희귀동물 서식지인 동강 제장마을 등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미국의 경우 1935년 역사유적지법(Historic Sites Act of 1935)에 의해 ‘국민의 영감과 혜택을 위하여 국가적 중요성을 갖는’ 유산자원을 ‘공적 사용(public use)을 위하여 보존하는 것’이 국가정책임을 선언했다. 또 1966년 국립역사유적보존법(National Historic Preservation Act)은 미국이 ‘그 역사적 유산에 기초하여 건설되고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러한 대체할 수 없는 유산의 보존은 공익에 속하므로 그 문화적, 교육적, 미적, 영적, 경제적 혜택의 유산은 미래세대를 위해서 유지및 관리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독일에 있어서 기념물의 보호와 관리는 각 주의 입법에 따라 다르다.  바이에른주의 기념물보호법에서는 ‘과거에 인간에 의하여 창조된 사물 또는 그 일부로서, 역사적, 예술적, 도시건축적, 학문적, 민속학적 의미에서 그 유지에 공공의 이익이 존재하는 것’을 기념물보호 대상으로 정하고 관리한다. 베를린 기념물보호는 ‘…유지에 공공의 이익이 존재하는 것’을 기념물(Denkmale)로 지정한다.

정신적, 기초가 되어줄 문화유산

각 국은 문화재 및 문화유산 보호뿐만 아니라 복원과 보수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많은 목조건축물이 파괴된 중국에서는 이전에 작성된 각종 도면 등을 활용해 복원에 나섰으며 문화재 보호에 일찍 나선 일본은 19세기 말 중요 목조건축물 대부분의 실측도를 작성했다. 때문에 1949년에 화재로 전소됐던 호류지 금당이나 이듬해 방화로 소실됐던 긴카쿠지 금각이 재건되어 여전히 관광의 명소로서 사랑받고 있다. 문화재를 관광산업과 연결해 국민의 경제적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헌법의 내용을 잘 지켜나가고 있는 사례이다.

그러나 문화재 및 문화유산 보호의 중요성은 경제적 이익 창출의 이유만이 아니다. 문화유산은 우리에게 과거의 선조들이 남긴 삶과 역사 및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풍부한 교훈을 제공한다. 국가적으로는 우리의 자랑이며, 우리에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정체성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다.

쉼 없이 달려온 아시아의 용 대한민국은 반성해야 한다. 빠르게 변해가는 이 시대를 헤쳐 나가야하는 대한민국의 정신적, 문화적 기초가 될 문화유산을 그 어떤 신식 고층빌딩 보다도 소중히 대접해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문화유산을 계승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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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뒤에 문화재 있다

세종관 뒤로 보이는 산 꼭대기에 위치한 목조건축물의 지붕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학우라면 영장산(靈長山) 산책을 추천한다. 운동화 한 켤레와 가벼운 등산도 마다하지 않을 자신감만 있다면 영장산 기슭에 자리잡은 천 년 사찰에 서서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학교 옆 태평고개를 넘어 영장산 오솔길을 끈기있게 오르면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된 망경암(望京菴)을 만나게 된다. 망경암은 고려후기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하늘로 뻗어있는 암벽에 석굴 비슷한 것을 만들고, 그 안에 돋음새김의 마애불을 새겼다. 이곳은 조선시대 초기까지 역대 임금들이 직접 와서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서울을 바라본다는 이름 그대로 200살이 넘은 느티나무와 바위 위에 들어앉은 마애불, 하늘과 동화되어 서 있는듯 한 미륵불 모두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함께 북쪽을 바라보노라면 세종관과 기숙사가 내려다 보이고, 멀리는 강남과 송파가 한 눈에 보인다.

망경암에서 내려오면 주택단지 사이에 남은 봉국사(奉國寺)를 조우한다. 1028년(고려 현종 19)에 창건된 봉국사는 천 년이란 긴 시간동안 고려와 조선과 대한민국을 겪어왔다. 한국전쟁 등 아픈 역사 속에서 무너지기도 했지만, 봉국사 내의 대광명전(大光明殿)은 명실 공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1호로 등록됐다. 대광명전은 기단의 양쪽에 사자형태를 한 조각상이 지키고 선 법당으로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인자 모양인 가장 단순한 맞배집이다. 그러나 지붕의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몸체에 비해 지붕이 커서 외관이 장중하다. 이 안에는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불상의 좌우로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있다. 천 년 세월을 간직한 봉국사는 그윽한 풍경(風磬) 소리를 들으며 휴식을 취하기 안성맞춤이다.

▲망경암 암지에 올라 바라본 우리학교 기숙사와 서울.
▲봉국사 대광명전과 시원한 웃음이 멋스런 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