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양재역 지하철 안에서 이상한 광경이 목격됐다. 평범한 차림새로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로 형형색색의 가발을 쓰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곳저곳에서 준비해온 옷과 소품을 이용해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기한 듯 쳐다보며 역을 빠져나온 순간, 이미 역 앞에는 다른 세상이 열려있었다. TV에서나 볼 수 있는 낯익은 캐릭터들이 눈앞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었고 또 그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다. 그 속에서 기자는 지금까지 살던 곳과는 다른 세계에 와있는 이방인이 된 듯 했다. 이 날은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 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축제가 있었다. 이 축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코스프레(Costume play)를 한다.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이하 코스어Cos·er)은 짧은 시간이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그들만의 사회를 만든다. 그들은 현실과 창조된 세계 사이에서 무엇을 얻고 있는 것일까?

현실에서 벗어나 ‘또 다른 나’를 찾아…
AT센터 코믹월드
 빨간 옷을 걸친 흰머리의 이누야샤 분장을 한 코스어가 맨발로 길거리를 뛰어 다니고 주황 옷을 입은 닌자 나루토 일행 코스어들이 비장하게 걸어 다닌다. 빨간 렌즈를 끼고 검은 날개를 달은 천사금녀부의 루시퍼와 판도라 하츠의 빈센트로 분장한 코스어들은 카리스마 있는 표정과 몸짓으로 벤치에 앉아 있다. 영화 속에서 잔인하게만 보였던 ‘스크림’ 가면을 쓴 사람도 길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보였다. TV에서만 볼 수 있었던 애니메이션 속 다양한 캐릭터들이 살아 있는 세상이 도심 한 복판,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다른 코스어들과 다르게 군복을 입은 학생들. 우리나라 군복을 입는 것은 법적으로 ‘불법’이기 때문에 미군 군복을 선택했다고 한다.

코스어들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캐릭터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영화 ‘블랙 호크 다운’에서 나오는 미군을 코스프레한 김기문(세종대1) 학생이었다. 김 학생은 어렸을 적 꿈이 군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개인사정으로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그는 못다 이룬 꿈을 코스프레를 통해서 풀었다. 김 학생은 “평소에 밀리터리에도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하고 코스프레를 하는 순간만큼은 내가 군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시작하게 됐어요. 다른 나의 모습을 찾는 거예요”라고 말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공원에서 만난 오성종씨(기계설비공, 25)는 놀이공원 마스코트 ‘로티’의 탈을 쓰고 있었다. 오씨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주말에 시간을 내 코스프레에 참여하러 왔다. 오씨는 “직장에서 틀에 박힌 일만 하던 내 모습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게 좋아서 코스프레를 하게 됐다”며 지팡이로 묘기를 보였다. 본인은 로티 탈 뒤에서 크게 웃었고, 이를 보는 사람들의 입에도 미소가 걸렸다.

이외에도 많은 코스어들은 잠시 동안 평소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지내보는데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열정이 있다면 ‘당당함’으로…

코스어들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겁내지 않고 과감하게 일상복을 던져버리고 색다른 옷을 입는다. 그들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버스를 탈 때도 전혀 부끄러운 기색 없이 당당한 표정이다. 스스럼없이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코스어들 사이로 가수 윤하의 노래 ‘혜성’ 곡조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가 보니 바이올린 켜는 남학생과 플롯을 불고 있는 여학생이 보인다.

이들 유영석(21) 학생과 황인영(진선여고1) 학생은 코스어들 사이에서 즉흥 길거리 연주회를 열고 있었다. 천상이 호흡을 맞추고 있던 그들은 그날 처음 만난 사이였다. 음악을 즐긴다는 공통점 하나로 같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유 학생은 동인그룹(음악에 대해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만든 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만큼 음악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유 학생은 “평상시에는 집 안에서 악기를 연주하면 이웃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항의를 해 마음껏 연주할 수 없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그가 선택한 방법은 거리의 악사였다. “거리의 악사로 활동하면서 나의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하는 그는 “사람들을 의식한다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며 “이렇게 나와서 연주하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당당히 내 음악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며 웃는다.

악기 연주를 좋아한다는 황 학생은 몇 년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이곳에 와서 연주를 해왔다. 황 학생은 “악기를 연주할 때 누군가가 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행복하다”며 “내가 음악을 좋아하고 사람들도 음악을 좋아해주는데 열정을 갖고 열심히 해야죠. 나를 위한 무대는 이 곳이에요. 앞으로도 이곳에서 정기공연 하려구요”라고 말하고는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그들은 아직 아마추어 연주자이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만큼은 프로 못지않았다. 유 학생과 황 학생의 연주가 끝나자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들의 열정에 박수로 응원해주었다. 악기를 내리고 관객들에게 품위있게 인사하던 어린 악사들의 모습은 당당함 그 자체였다.

이 날 축제의 취재를 마치고 다시 지하철역을 향했다. 지하철역에 가까워질 수록 코스어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세계가 점차 사라졌다. 현실로 돌아오고 있는 과정이었다. 지하철 역 안, 일상에 아직 남은 몇몇 코스어들은 그 곳에서 신기한 구경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그들이 만든 다른 세계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보다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평소 자신의 모습과 다른 나를 꿈꿔보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 그런 속내를 숨기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채 살아간다. 단 하루지만, 이들의 당당한 용기만큼은 귀감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