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초입에 찾아간 서울 북촌에서는 문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마침 SBS 프로그램인 〈짝〉의 제작진이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과연 이 곳 북촌에서 시린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자신만의 짝을 찾을 수 있을까?
사랑과 문학이 숨쉬는 북촌을 사진으로 만나보자.

제법 높아진 하늘과 쌀쌀해진 날씨에 어깨를 움츠리며 문득 다가온 가을을 느낀다. 따뜻한 차 한 잔과 책 한 권이 생각나는 독서의 계절. 이야기가 있는 거리를 거닐며 색다른 독서를 해보는 건 어떨까. 가벼운 마음으로 북촌 곳곳에 새겨진 문학의 정취를 느끼러 떠나보자.

북촌에 도착해 처음 카메라를 꺼낸 곳이 정독도서관이다. 이 일대는 1970년대까지 경기고, 휘문고, 창덕여고가 있었고, 지금도 중앙고와 풍문여고, 덕성여고가 남아 있는 대표적인 학교길이 다. 여러 학교가 한 곳에 모여 있다 보니 교육 중 심지로 인식되기 쉬웠지만, 등·하굣길에 짝사랑하는 학생의 가방 속에 마음을 담은 쪽지를 몰래 집어넣고 시치미를 떼는 풋사랑이 오고간 장소이기도 했다. 최인호의 소설 〈머저리 클럽〉에서는 정독도서관 앞에서 첫사랑을 기다리는 소년과 만날 수 있다.

도서관에 다다랐을 때엔 마침 때 이른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라고 영민이가 킁킁거렸다. (중략) 그때였다. 도서관 시간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꾸역꾸역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신주 뒤에 몸을 숨기고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그녀인지 아닌지 구별하려고 기웃거렸다. 소녀가 맨 나중에 나오고 있었다”  - <머저리 클럽>中

청소년기의 추억과 설렘이 깃든 장소에 걸맞게 주변 골목 곳곳에는 분식집과 라면집, 지금은 많이 사라진 ‘달고나 장수’ 등이 추억처럼 남아있다. 양 갈래 머리에 남색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여고생의 두근거리는 마음이 느껴질 듯한 정독도서관을 뒤로하고 헌법재판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이제 나는 살아서 서른네 살이 됐고 그 나무는 육백 살이 넘었다. 육백년을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이제쯤이면 지하철에서 내가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한 것이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그 나무는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나 나나 이제는 삶의 행로가 하나의 거대한 농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농담은 하나도 재미가 없으며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우리는 그런 것도 농담이냐고 쏘아붙이기도 하고 이게 웃긴 얘기가 아니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삶을 이해하기에 서른네 살이라는 나이는 아직도 부족하다. 나는 우산을 뒤로 젖히고 고개를 들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선 백송을 올려다봤다”  -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中

헌법재판소 안의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 백송’은 김연수의 소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배경이다. 이 소설은 남녀가 주고받는 농담을 상대방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고독함에 빠지고 마는 현대인들의 공허함을 이야기한다. 재동 백송을 떠받치고 있는 회색 철제 버팀 기둥과 쇠줄, 그리고 삼청동과 가회동의 쓸쓸한 골목길이 그의 공허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삶의 행로가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라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엔 아직 어리기에 그저 씁쓸함을 남기고 헌법재판소를 뒤로 했다.

기와지붕이 우뚝한 한옥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계동 입구에 다다랐다. 계동은 채만식의 <태평천하> 속 욕심보가 덕지덕지 붙은 윤직원 영감의 동네다. ‘계동의 소문난 부자’로 이름나 있지만 구두쇠인 윤직원이 인력거꾼과 요금 실랑이를 벌였을 법한 한옥들 사이를 지나면, 그 옛날의 흔적이 보인다. 밥집, 구멍가게, 목욕탕, 방앗간이 즐비한 골목은 시간을 멈춘 듯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거대 상업 자본에 염증을 느낀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으로 지금도 사랑을 받고, 이제는 외국 관광객을 비롯한 구경꾼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 북촌. 거기서 첫사랑을 기다리는 소년의 설렘을 담고, 현대인들의 공허함을 표현하고자 고뇌한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북촌의 속살을 느껴보는 또 다른 재미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북촌의 겉모습과 삶의 방식은 많이 달라졌고, 한결 다양화했지만 문학 작품 속에 담긴 아련한 추억을 일깨우는 옛 풍경은 아직 많이 남아 고즈넉한 멋을 풍기고 있다.
 

글 - 박지현 기자
사진 - 신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