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에게 생사(生死)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한 나라의 국왕이라면 백성들의 질병, 특히 떼죽음을 몰고 다니는 전염병을 다스리는 것은 인정(仁政)의 기초가 아니던가?” 고종과 조선 정부가 구상하고 실천에 옮긴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부, 바로 ‘의료 근대화 작업’이다. 1880년 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국립병원인 ‘제중원’과 교육기관인 ‘의학교’로 서구에 비해 뒤늦게 시작된 우리나라의 의료 역사는 오늘날에 이르러 ‘의료 강국 대한민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호부터 메디컬 캠퍼스에서 대한민국 근대 의료의 시초와 더불어 의학, 한의학, 약학, 간호학, 의료과학의 발자취를 시리즈로 살펴본다.

서양식 병원을 세우다

 아버지인 대원군의 수렴청정 이후 왕권을 잡은 고종은 문호개방 이후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를 실천한다. 그 일환으로 진행된 ‘의료 근대화 작업’은 병으로 죽어가는 백성을 살리는 데에 있어 한의학의 한계를 시인하고 서양 근대의학의 수용을 추진한다. 1884년 12월 4일 저녁 7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우정국(郵政局) 개국 축하 연회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역사적 대사건인 갑신정변이 시작된 것이다. 왕비의 조카로서 당시 조선 정계 최고의 실력자였던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찔려 죽어가고 있었다. 이 때 미국 공사관 부속의사로 일하던 알렌(Horace N. Allen)은 민영익의 환부 처치를 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기록되기를 “동맥을 결찰(지혈을 위해 조직이나 혈관의 일부를 매듭짓는 것)하고 명주실로 봉합 후 석탄산과 요도포름으로 소독했다. 모르핀을 주사해 통증을 완화하고 건전지를 이용한 전기치료로 마비된 환부를 이완시켰다”고 한다. 조선인에게 서양 의술의 우수성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알렌은 여세를 몰아 고종에게 국립병원 설립을 제안했고, 조선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국립병원인 ‘제중원’이 탄생한 것이다.

 나라에서 의사를 키우다

 대한민국 최초의 의사 양성 기관인 ‘의학교’는 “의원(醫院)은 병을 고치고 생명을 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귀하다”라는 전제 아래 설립되었다. 1899년 3월 24일 ‘의학교관제’의 공포와 함께 설립된 ‘의학교’의 교육기간은 3년 이었으며 모든 경비는 나라에서 부담했고, 따로 입학시험을 치렀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 우수 인재들만 입학할 수 있음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도 되겠다. 개교 3년 후인 1902년 여름, 마침내 19명의 학생이 졸업시험을 통과했다. 이 땅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 의사들이 배출된 것이다. 이들은 주로 군대에서 군의관으로서 장병의 질병 치료에 주력하며 근대의학 보급에 견인차 구실을 했다

 첫 한국인 의사 등장

 사진 2의 셋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 졸업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동양인이 틀림없다.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 본명 서재필. 한국인 최초의 양의(洋醫)이다. 사대부로서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 선배들과 어울리며 개화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던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했으나 실패하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서재필은 1892년 미국 컬럼비아 의과대학(현 조지 워싱턴대학 의대)야간부를 졸업하고 가필드Garfield병원에서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한국인 최초로 양의가 된 것이다. 이후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해 정치 및 사회분야뿐만 아니라 의사답게 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제중원의 설립과 양의 서재필의 탄생이 모두 갑신정변과 엮여 있어 이 변혁이 대한의 의료 역사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형설지공의 마음으로

 국가 주권의 변화는 병원을 이용하는 환자와 의료진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10년 8월, 국권을 박탈당하자 ‘대한의원’의 이름은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바뀌었고, 직원들이 모두 일본인으로 채워짐은 물론이오,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로 전락해버린 ‘대한의원 부속의학교’에서 우리의 선학들은 불평등한 교육체제 아래 서글픈 현실을 몸소 체험해야 했다. 별개로 총독부는 한국에 건너온 일본인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식민통치의 문명성을 보여주고자 보건·위생 부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관공립병원을 세웠고 임상의사만 양성하겠다던 방침을 변경해 의학 연구자를 양성하는 ‘제국대학’도 설립했다. 그러나 민족차별로 인해 한국의료인의 입지는 매우 좁았고, 한국인의 대다수는 시료환자(가난하여 무료로 치료받는 환자)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대한의 의사, 치과의사, 간호부, 산파들은 ‘형설의 공’을 쌓아 근대 의료인으로 성장했고 해방 후 한국 의료계의 주역이 되었다

  한국인, 열정으로 차별을 넘다

 의사는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열악한 처지를 생각한다면 의사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적은 월급, 막대한 연구비, 조선인이기에 겪어야 하는 부조리. 왠만한 집안아 아니면 포기해야만 했다. "의사 1명 채용. 단 내지인에 한함" 여기서 '내지인'이란 일본인을 뜻한다. 한국인 의사의 좌절감은 클 수 밖에 없었다. 개원을 해도 형편이 열악한 한국인 환자를 보살피면서 약값과 진료비를 받아보겠다는 기대는 한숨으로 새어나갔다. 그러나 대한의 의료인은 굴복하지 않았다. 진료실에서, 연구실에서, 교실에서, 때로는 대중 속에 파묻혀 우리의 선조들은 조국에 어떻게 봉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미국의학 적극 수용

 1954년부터 1961년까지 약 6년의 기간 동안 미국 정부는 우리나라의 대학에 교육 원조를 시행했다. 바로 ‘미네소타 프로젝트’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지원한 교육원조 사업 중 최대규모였으며 그 결과도 매우 성공적이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 다녀온 교수들을 통해 현대의학의 새로운 동향이 급속히 소개되었고 미국식 의학교육이 빠른 속도로 자리 잡았다. 과거 일본의 이론식 의학교육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창의적이고 실용적인 임상과 실험 중심의 미국식 의학교육 방식으로 전환되어 갔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1970년대 한국 의학계를 이끌어 갈 새로운 인력이 양성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우리나라 의학교육과 연구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김재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