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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치욕의 역사를 쓰게 만든 을사조약
손명준 기자  |  gc599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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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21  17: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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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11월 17일.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강압적으로 조선 조정을 탄압해 을사조약에 서명하게 함으로써 조선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날이다.
 을사조약은 고종과 대신들의 철저한 반대 속에서 이루어졌다. 고종의 위문 파견대사로 파견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과 대신들을 만나 사실상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조약에 서명하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고종과 대신들은 세 차례나 지속된 협박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와 함께 입궐해 회의를 열고 대신들 한 명 한 명에게 조약의 찬반을 물어 을사조약을 체결하려 했다.
 그 결과 이토는 고종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이 ‘을사오적’으로 불리는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과 함께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가져가고 통감부를 설치해 조선에 대해 노골적으로 간섭하게 된다. 통감부는 모든 분야의 최고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사실상 조선은 일본의 통제 하에 놓인 처지가 됐다.
 물론 이 을사조약은 고종의 서명을 제외한 을사오적의 서명만 있었고 강제적으로 체결된 조약이라는 점에서 무효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알고 있던 우리 민족은 다양한 형태로 조약 반대투쟁에 나선다. 고종은 미국에 체재 중인 황실고문에게 “보호조약은 무효임을 선언한다”며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고 전했고 수많은 유생과 관리들이 조약 반대를 천명하며 의병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을사조약으로 인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신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 민족이 시대를 앞서나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고 을사오적을 비롯한 일부 친일파는 막대한 부를 챙겼다. 실제로 을사오적의 일인인 학부대신 이완용의 후손들은 장기간에 걸친 소송 끝에 시가 60억 원에 달하는 땅을 되찾으면서 많은 이들의 입맛을 쓰게 만들었다.
 을사조약은 한민족의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번, 민족의 역사가 끊긴 시기였던 일제강점기를 연 한국사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이로부터 35년간 지속됐던 일제강점기는 수탈과 치욕의 역사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고 지속적으로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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